[정희진의 어떤 메모]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등록 :2017-05-12 19:53수정 :2017-05-12 20:17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영정, 김홍미리, 전희경 지음, 그린비, 2017
“왜 여학생 휴게실만 있나요?”(그 외는 남성의 공간이니까요), “왜 여성학자가 국방문제를 공부하나요?”(국제정치가 원래 젠더에서 시작되었거든요), “동성혼 합법화는 시기상조 아닌가요?”(그러면 적당한 시기를 알려주실래요?). 나는 더 이상 이런 ‘마주함’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겐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
며칠 전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남성의 실화를 다룬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를 보았다. 여성 유대인 역사학자인 주인공은 홀로코스트가 ‘있었음’을 증명해야 할 처지다. 이 상황을 영화평론가 홍수정은 이렇게 표현했다. “참을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자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이 대화(對話)의 ‘원뜻’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는 대화에 대한 착각이 만연해 있다. 대화가 곧 민주주의는 아니다. 말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대화를 찬양한다. 대화로 해결합시다? 말의 가치, 말하는 방식, 발화자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은 대화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대화야말로 투쟁이다. 대화를 뜻하는 영어 ‘conver/sation’의 동사는 ‘convert’(개종하다), 대화는 개종할 만큼의 격렬한(폭력적인) 변화가 필요한 노동이다.
‘진정한 대화’는 자기개조를 요구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인생사다. 고민해야 할 것은 대화의 중요성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지배자의 언어와 피지배자의 언어가 ‘있다’. 아니, 피지배자의 언어는 가시화되지 않거나 폭력으로 간주된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모국어가 영어와 한국어인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하는 상황도 그중 하나다. 사회적 약자란 평생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대화와 평화는 논쟁적인 언어다. ‘화’의 의미가 다르다. 대화(對/話)가 평화(平/和)로 귀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의 속삭임 외에, 대화는 적대적 행위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되려는 이들의 ‘토론’은 권력의 장소를 잘 보여준다. 홍준표씨의 발언 수위가 곧 그의 권력이다. 그래서 “경쟁 후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사이다’가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대화를 재해석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를 만난 순간,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나의 페미니즘’ 여정기다. 이 책의 지은이 여섯 명은 마흔 언저리에 있는 여성주의자들로서 그간 사회와 “어떻게” 마주해왔는지에 대해 썼다. 이들 중 몇몇은 20년을 꼬박 헌신적인 여성주의자로 살아왔다. 자기만의 방, 언어를 추구하는 이들의 고뇌는 나를 고립에서 구원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공부란 정의(正義)를 요구하는 실천임을 깨닫게 해준 글귀가 있었다. “우리에겐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있다(권김현영, 40~44쪽)”. 자기주장(“성차별 없음”)을 위해 질문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결국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질문하는 방법을 잊은 사회는 함께 사는 방법을 모색하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호기심, 고정 관념이나 차별 여부에 대한 질문 방식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한다. 다르게 질문하는 법, 이것은 곧 ‘국가경쟁력’이기도 하다. 선거도 그 과정이다. 국가권력, 자원 배분의 문제인 것이다. 홀로코스트나 성차별 유무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와 ‘그 이상’을 논의하는 사회의 삶의 질이 같을 리 없다.
삶은 앎에 달려 있다. 사회적 약자가 자기 현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 내가 생각하는 가장 모욕적인 차별이다. 나는 그 이상의 논의를 하고 싶다. 남성 문화가 그토록 주장하는 표현과 학문의 자유의 의미는 자신의 자유가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임을 아는 것이요, 알기 전까지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왜 ‘피해자’에게 차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스스로 공부하면 된다. 이것은 시민의 의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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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529.html#csidx5abde48f6eb6829b47c34c63807e3d0